우리는 최근 시리즈A 투자 라운드를 120억 원 규모로 마무리했다.
숫자만 보면 이 소식은 여러 투자 기사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이번 투자를 이야기할 때 핵심은 얼마를 유치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시점에 이 라운드를 마무리했느냐였다.
우리 캡테이블의 마지막 자리를 채운 곳은 산업은행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단순한 참여 소식이 아니라, 한국딥러닝의 현재 위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시리즈A의 끝에서 산업은행이 선택했다는 것의 의미
시리즈A는 보통 가능성을 평가받는 단계다. 기술이 시장에서 통할지, 고객이 실제로 돈을 지불할지, 조직이 성장 압력을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집중되는 구간이다. 그래서 이 단계의 투자는 대체로 분산되고, 신중하며, 여러 가능성에 대한 포트폴리오 성격을 띤다.
그런데 이번 라운드는 그 전형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이미 라운드는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자금이 절박해서 한 자리를 더 채워야 하는 국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지막 한 자리를 남겨두었다. 그 자리는 단순한 여분이 아니라, 이 다음 단계를 어떤 기준으로 정의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산업은행이 채웠다.
이 장면이 특별하게 읽히는 이유는 금액 때문이 아니라, 시점과 위치 때문이다. 시리즈A의 끝에서, 그것도 라운드를 닫는 역할로 들어왔다는 점은 이 투자가 초기 베팅이나 관계 설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투자를 ‘초기 투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
산업은행이 시리즈A 단계에서, 그것도 전체 라운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참여하는 장면은 업계에서도 흔한 그림은 아니다. 통상 산업은행은 기업의 성장 후반부, 특히 상장 직전이나 대규모 스케일업 국면에서 등장하는 투자자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투자를 “이른 단계에서의 기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방향이 확인된 회사에 대한 판단에 가깝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될지 안 될지를 검증하는 단계였다면, 이 시점에 이런 선택은 나오기 어렵다. 이번 투자는 우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강조한 것은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어떻게 운영되느냐’였다
투자 과정에서 우리는 기술 데모를 앞세우는 대신, 그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문서 AI는 모델 성능 수치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서 환경은 늘 불완전하다.
문서 형식은 제각각이고, 스캔 품질은 일정하지 않으며, 예외 상황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문서는 다른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으면 업무 흐름에서 의미를 갖기 어렵다.
우리는 이런 조건을 전제로 문서 AI를 운영해 왔다.
공공과 기업 환경에서 단발성 PoC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구조 안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경험을 쌓아왔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하고, 어디까지 자동화할 수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 사람의 개입이 필요한지를 하나씩 정리해 왔다.
이 운영의 축적이 없었다면, 이번 선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서를 ‘텍스트’가 아니라 ‘업무의 출발점’으로 다루는 이유
우리가 문서 AI를 접근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문서를 단순히 텍스트로 변환하는 대상이 아니라, 업무가 시작되는 단위로 본다는 점이다.
현실의 문서에는 표와 도식, 위치 정보, 문맥적 연결 관계가 함께 얽혀 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확하게 읽어도 실무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데이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문서를 시각 구조와 언어 의미가 결합된 객체로 다룬다.
멀티모달 기반으로 문서의 레이아웃과 의미 단위를 동시에 해석하고, 그 결과를 후속 업무에 바로 연결 가능한 구조화 데이터로 만든다. 이는 인식 정확도 경쟁이라기보다, 업무 연결성을 기준으로 한 설계에 가깝다.
이제 문서 자동화의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이번 투자 이후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방향은 분명하다. 문서를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문서로 일이 끝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문서에서 구조화된 데이터가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는 누가 확인하고 어떤 조건에서 승인하며 어떤 시스템으로 전달되는지가 이어진다. 이 흐름이 자동화되지 않으면, 사람의 개입은 계속해서 남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워크플로우 자동화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문서 AI 위에 에이전트를 얹되, 실제 운영 환경을 전제로 설계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자율’보다 ‘통제’를 먼저 택했다
우리가 말하는 에이전트는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제 업무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성보다 재현성과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행 조건이 명확한 트리거, 결과를 점검하는 검증 로직, 허용된 경로만 수행하는 구조를 전제로 에이전트를 설계하고 있다. 에이전트를 블랙박스로 두지 않기 위한 선택이며, 장기적인 운영을 염두에 둔 결정이다.
화려해 보이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공공과 금융, 엔터프라이즈 환경에서는 이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다.
2026년은 실험이 아니라 ‘운영의 해’
우리가 바라보는 2026년은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는 시기가 아니다.
상반기에는 이미 진행 중인 파일럿을 중심으로 운영 검증과 관리 체계를 더욱 단단히 만들고, 하반기에는 문서 기반 업무에서 판단과 처리, 시스템 연동까지 이어지는 워크플로우 자동화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빠르게 커지는 것보다, 맡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마지막 자리가 남긴 메시지
캡테이블의 마지막 자리는 단순히 남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다음 단계를 정의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산업은행이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은, 더 빠르게 가라는 주문이 아니라 더 높은 기준으로 운영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이번 시리즈A는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설명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방향이 아니라, 그 방향에 맞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다.